홈으로

소개| 게시판| 자료| 동영상| 갤러리| 체험| 약도

광명쇼핑몰

광명의학

광명의학적처방

광명의학성과

광명자연건강회

괄사요법

벌침(봉독) 요법

사상체질 요법

새로운 자연건강법

이침(귀침)요법

안와침법

SUN 건강메일

생태요법

정신요법

크리스찬 禪

두개골 지압

감기

간장병

갑상선질환

견비통(肩臂痛)

광명뜸법

눈병

동사 익수

두통과 뇌기능 향상

무좀

무릎관절/ 키성장

부인과

비만증

소아과

소화기(급체)

수험생의 건강

심장병

안면신경마비

이비인후과

중풍

척추측만증

축농증

치매

탈모증

폐질환

횡격막 호흡법

동상 동사자

아로마 테라피

생활참선

발목펌프

요통

당뇨

EFT 정신-신체요법

현재위치 : Home> 크리스찬 禪
눈병 (6) 폐질환 (6) 당뇨 (17) 심장병 (6)
간장병 (3) 비만증 (4) 요통 (7) 탈모증 (4)
중풍 (6) 감기 (2) 치매 (6) 무좀 (1)
소아과 (4) 발목펌프 (8) 부인과 (4) 무릎관절/ 키성장 (5)
척추측만증 (5) 이비인후과 (3) 안면신경마비 (4) 두통과 뇌기능 향상 (3)
견비통(肩臂痛) (10) 동사 익수 (5) 생태요법 (15) 정신요법 (17)
생활참선 (17) SUN 건강메일 (19) 크리스찬 禪 (10) 두개골 지압 (6)
사상체질 요법 (7) 축농증 (3) 소화기(급체) (3) 광명뜸법 (5)
수험생의 건강 (2) 아로마 테라피 (2) 새로운 자연건강법 (1) 이침(귀침)요법 (4)
괄사요법 (2) 벌침(봉독) 요법 (5) 횡격막 호흡법 (1) 갑상선질환 (4)
안와침법 (2) 동상 동사자 (1) EFT 정신-신체요법 (4)

제    목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 극복(3)

2004/01/10

내    용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비교(3)

본각과 시각 / 아버지와 아들의 차이

중생과 부처는 원천적 동일성을 실현하게 되는 것을 말하지만, [요한복음]에서는 앞(1),(2)에서 본대로, 아버지-아들의 관계로 한정된다. 하지만 현세를 사는 우리로서는 언어적인 또는 의미 전달적인 차이가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다면 세상이 둘이나 셋..이며, 진리는 하나가 아니라는 오류가 되기 때문이다.
결론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인간은 현세를 방편으로 삼고 열린자세로 정진할 뿐이다.

1. 본각(本覺)-시각(始覺),/ 아버지-아들의 차이

[대승기신론]과 [요한복음]에는 차이도 있다.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깨달음은 '시각'의 순간에는 누구든 본래 타고난 그 여래의 성품을 이루게 된다.
중생과 부처의 원천적 동일성을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중생들간 차이는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에서 이러한 '본각-시각'의 구조는, 앞에서 본대로, 아버지-아들의 관계에만 주로 해당된다.
아버지-아들의 관계가 여느 인간에까지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다.
여느 인간이 하느님의 비밀을 알고 그 구원적 섭리에 동참하려면, 육화로서의 예수라는 중개자가 필요하다.
* 물론 [대승기신론]도 그 모든 깨달음의 진리는 석가모니불로 인해 알려진 것이다.
그러나 그 석가모니불과 여느 중생은 결국 '불'이라는 사실에서 원천적 동일성을 지니는 것과는 달리 믿음으로 빛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사람이 곧 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데서 차이가 있다.
*이것은 앞에서 본대로 불교와 그리스도교 전반의 차이이기도 하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누구든 '아들'이라는 중개자를 통할 때, 그 아들이 아버지와 누리는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그 아들과 누릴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아들이 아버지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처럼, 그 아들을 믿는 이는 그 아들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두고 '믿는 이'를 예수의 친구라고까지 격상시킨다.- "내가 여러분에게 행하는 일을 하면 여러분은 나의 친구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더 이상 종들이라고 부르지 않겠습니다. 사실 종은 자기 주인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친구들이라고 불렀습니다. 내가 내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을 모두 여러분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입니다."(15,14-15)
예수가 알려준 하느님과 인간의 원천적 관계를 실존적으로 실현할 때, 더 이상 '종'이 아니고 '친구'라는 음성이 들여온다.
종은 주인과 수직적 관계에 있지만, 친구끼리는 수평적 관계에 있다.


아들과 아버지가 하나이듯이, 예수가 알려준 진리를 실현하게 될 때, 그 실현자는 예수와의 원천적 관계 안에 수평적으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는 이렇게 기도한다:
"저는 아버지께서 제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으니,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제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고, 아버지께서 저를 파견하신 사실과 또한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신 사실을 세상이 알도록 하려는 것입니다."(17,22-23)

아버지의 인간 사랑은 아들 사랑에서 이미 다 보여졌다. 인간은 아들을 통해 아버지의 사랑을 체험하며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아들이 아버지와 맺은 관계와 비슷한 관계를 여느 인간들도 그 아들과 누리게 되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도 나를 압니다.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10,14-15)
이런 식으로 해서 여느 사람들도 그 아들과 같은 자리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믿는 이들이 예수와 똑같아지는 것은 아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를 구분하기 위해 예수에게 '
외아들'(monogenes)이라는 표현을 쓴다.
예수는 사실상 하느님의 '외아들'이다.
'외아들'이라는 표현은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표현이다.
다른 이들도 원칙적으로 '아들'일 수 있지만, 결코 '외아들'은 아니다.
아들의 성품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는 예수와 '친구'로 불릴 수는 있지만, '외아들'의 자리에까지는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인 이들은 외아들과 아버지가 누리는 관계와 유사한 관계를 외아들과 누릴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이 [요한복음]과 [대승기신론]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전반적인 차이이기도 하다.

*필자 주 : "외아들"을 텍스트에 충실하면 하나라는 의미로 보아야 마땅하지만, 하느님의 아들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인간이 외아들을 통해 구원되었다면 그 세계에서 아들과 외아들은 어떤 의미가 있을지 우리는 아직 모른다.
다만 구원의 세계는 온전함이며 일치 그 자체로 볼때 외아들의 독자성을 강조함은 타당한 접근이 될 수 없다고 사료된다.


2. 아미타불과 예수

지금까지는 대부분 [요한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지상 생애와 관련된 이야기들과 [대승기신론]의 비교였다. 그런데 예수가 지상을 떠날 무렵과 관련된 부분에서는 정토불교의 시각과 대단히 유사한 구조를 보여준다.
특히 이것은 [요한복음] 14장에서는 - "내 아버지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여러분에게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겠습니까?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해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14,3)
예수는 아버지 집에 제자들이 머물 '자리'(mone)를 마련하러 간다고 한다.
아마도 불자라면 이것을 보고 법장(法藏)보살의 서원을 연상할 수 있을 것이다.
정토종의 소의경전인 <무량수경>(無量壽經)에 의하면, 석가모니불은 언젠가 법장보살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무한한 과거세에 법장보살이 중생의 고통을 보고서 일체 중생을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지복의 땅'(極樂, sukhavati)을 건설하겠다는 서원을 세웠다. 그는 무한히 오랫동안 고행을 한 끝에 자신의 서원을 완전히 성취하고 정토의 부처인 아미타불(阿彌陀佛), 즉 무량수(無量壽, Amitayus)불/무량광(無量光, Amitabha)불이라는 상징적 형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여기서 아미타불은 보신불(報身佛)이다.
보신불은 불타의 공덕, 법력, 기쁨의 형상이며, 중생을 구원하는 자비의 몸을 상징한다.
일체의 상(相)을 초월한 법신불이 상 아닌 상의 세계로 자신을 제한하여 내어준 부처인 것이다. 이러한 아미타불의 공덕으로 이미 구제의 길은 마련되어 있다.
석가모니불은 법장보살이 그의 목적을 달성했고, 그 서원이 성취되었기 때문에 이제 구제의 길은 모든 중생에게 열려 있다고 선언한다.
이제 중생의 할 일은 아미타불의 이름을 부르고 외우는(南無阿彌陀佛!), '쉬운 실천'(易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그것을 실천할 때 정토에 왕생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복된 소식'을 전해준 이는 석가모니불이었으니, 보신불은 화신불과의 관계 속에서 비로소 알려지게 된 셈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 진리란
인간의 창작 이전에 이미 이루어져 있고, 인간의 구체적인 노력에 앞서 주어져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일체의 이름과 상을 초월한 불타로부터 상의 세계로 향하는 움직임이 먼저 있고서야 석가모니로 인한 역사적 매개도 가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상을 초월한 절대(법성법신)가 스스로를 제한하거나 부정하여 상대적 절대(방편법신)로 나타나는 움직임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석가모니가 전한 구원 드라마는 사실상 법성법신의 자기 전달인 셈이다.

예수도 제자들이 거처할 곳을 마련해놓고 다시 돌아와 자기가 있는 곳에 제자들도 있게 하겠다고 약속한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14,10a)  또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들은 내 나름대로 하는 말이 아니라, 내 안에 머물러 계시는 아버지께서 당신의 일들을 하시는 것"(14,10b)이라는 사실, 한 마디로 아버지와 아들의 '불이적'(不二的) 관계이다.
아들이 말하고 일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버지께서 아들 안에서 아들의 모습으로 스스로를 내어주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아들의 모습으로 스스로의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들 말의 신실성을 뒷받침해준다.
마찬가지로 '저쪽'에서 먼저 인간에게 자신을 내어주셨기에 인간의 구원 드라마는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아들은 "여러분이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여러분을 택한 것"이라 말한다(15,16a) 진여가 무명에 훈습하기에 그 무명을 제거하고 깨칠 수 있는 것이듯, 중생의 존재에 선행하는 아미타불의 본원(本願)이 이미 있기에 중생이 정토에 태어날 수 있는 것이듯, 인간은 아들에 의한 본각의 구체화라는 사건이 먼저 있었기에, 즉 먼저 구원으로 택해졌기에 비로소 구원될 수 있는 것이다.
제자가 예수를 택했기에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제자를 택했기에 구원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다시 돌아와 제자들을 데려가겠다 말하는 예수는 분명히 역사적 예수이면서도 동시에 단순히 역사의 인물로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시 돌아오겠다 말하지만, 사실상 이 때 예수는 떠나본 적이 없는 일상의 예수가 아니라, '다시 돌아온 예수'의 차원에서 말한다.
다시 돌아올 것처럼 말하지만, 그 '돌아올' 예수는 사실상 다시 '돌아온' 예수와 같고, 더 나아가 예수가 '앞으로 마련하겠노라'는 자리도 사실은 '이미 마련되어 있는' 자리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상호내주적(相互內住的) 관계(10,30; 14,9-10)에서 보듯, 제자들의 자리가 마련될 "아버지의 집"(14,2)은 동시에 "아들의 집"이기도 하며, 아들 예수는 이미 그렇게 마련되어 있는 진리의 완전한 구현자이기 때문이다.


법신불의 화신(化身)인 석가모니불이 보신불인 아미타불에 대해 말하고 있듯이,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구체화로서 '지금 여기 있는 아들'이 '다시 돌아올 아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법신불, 화신불, 보신불이 부처 세계의 세 차원이면서도, 서로 분리되지 않는 상즉적(相卽的)이고 상동적(相同的)인 존재이듯이, 아버지, 역사적 예수, 돌아올 아들 역시 비슷한 관계에 있다.
그리고 이러한 관계는 [대승기신론]에서 말하는 "삼대"(三大), 즉 본체(體), 속성(相), 작용(用)의 구조와도 통한다.
삼대(三大)가 대승인 일심(一心)의 세 측면이듯이, 아버지, 현재의 아들, 돌아올 아들은 한 분 하느님의 세 측면이다.
모두 상즉적(相卽的)이고 상호내주적(相互內住的)이다.
[요한복음]에서 제자들에게 "다시 와서 여러분을 내게로 데려가겠다"고 말하는 예수는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육화', 즉 역사적 존재이다.
그러나 석가모니불이 그랬듯이, 예수도 단순히 역사내적(歷史內的)으로만 말하는 것은 아니다.
석가모니라는 화신불이 법신불의 초역사적 구체화로서의 보신불에 대해 진술하듯이, 역사적 존재인 예수가 다분히 초역사적 존재인 '다시 돌아올 아들'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그 다시 돌아올 아들을 분명히 보여줄 이로 [요한복음]에서는 '협조자(성령)'를 거론한다.
예수는 아버지께 요청해 '협조자'를 세상에 보내주겠다 한다.(14,16)
그런데 이 협조자는 이미 제자들 안에 함께 머물고 있는 "진리의 영"이다.(14,17)
동시에 아버지가 보내주는 아들의 다른 이름이다.(14,26a)
그이가 오면, 그 동안 아들이 제자들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해줄 것"이라 한다.(14,26b)


지금 이 순간에 이루어진 미래
 

성령이 임하면 "그 날 여러분은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여러분은 내 안에 있으며 나도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14,20)
즉, '아버지-아들-여러분' 사이에 벌어지는 삼중적 상호내주의 관계이며, 이러한 관계는 미래가 아니라 사실상 현재의 사건이다.
예수가 떠난 듯 했지만, 하느님께서 함께 하듯 사실상 언제나 함께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협조자가 오면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결국 아들이 떠나고 협조자가 오고 과거의 일이 다시 떠올려지는 식으로, 시간적 순서에 따라 일이 진행되는 듯 해도, 원천적인 차원에서 보면, 이러한 사건은 영원부터 이루어져 있는 본래적 사실의 구체화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도 앞으로 '돌아올' 것처럼 말하지만, 그는 이미 '돌아온' 이나 다름없는 이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금 말을 하고 있는 예수는 일체의 상을 넘어선 아버지의 전적인 구체화이다. 그래서 그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며, "그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수 없다."(14,6) 아버지께로 이르는 길은 그 아버지를 보여준 이(14,9)를 통해서일 뿐이다.
"나무아미타불"을 믿고 외움으로써 정토에 왕생하듯이, 그래서 "아들의 이름으로 청하는 것은 무엇이나 아들이 다 해준다"(14,13-14)고 하는 것이다. 다만 믿음이라는 '쉬운 실천'(易行)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이런 식으로 예수는 마치 아미타불이 불자들에게 지니는 그 깊이와 상통하는 깊이를 지닌다.

예수의 모습에서 제자들은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을 보는 불자들의 깊이와 상통하는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예수가 마련하고자 한 "여러분을 위한 자리"라는 표현을 듣고서 자신들의 "자리" / "있을 곳"을 떠올리는 그리스도인의 내적 깊이와 정토에 대한 믿음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외는 불자들의 내적 깊이는 서로 통하는, 비슷한 깊이의 것이 아니겠는가 싶다.
신학자 존 캅(John B. Cobb, Jr.)이나 길희성교수의 말들에서 보여주는 유사한 맥락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불교 신자가 아미타에서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그리스도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또한 불교 신자들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배운 것을 연구함으로써 아미타에 관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요약된다.
그러나 이는 그리스도인에게 지니는 그리스도의 '깊이'와 불자에게 지니는 아미타불의 '깊이'가 상통한다는 차원에서만 말할 수 있을 뿐일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깊이'는 그리스도인이 불교를 보고 불교 역시 인간 구원의 종교임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그리스도교적 근거이며, 마찬가지로 불자가 그리스도교를 보고 그리스도교 역시 인간을 해탈의 길로 인도하는 구제의 종교일 수 있음을 인정할 수 있게 해주는 불교적 근거라고 정리해볼 수 있다.
좀더 부연하면, 두 종교를 동일한 실재라고 말하기 보다는,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서로를 받아들이면서 바로 그러한 방식으로 저마다의 생명력을 유지해나가게 하는 그 근거가 저마다 비슷한 깊이의 것이라 실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서로 열린 마음을 견지할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상기 내용은 이찬수 / 2000년종교학회발표논문을 비판적으로 읽으면서 필자가 쉽게 정리해서 올린 것임을 밝힘니다.

매 장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 18-2 남대문로지하상가 제1호
상담 및 배송확인: 02)754-0533  사업제휴 팩스02)754-0534
사무실 :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가 18-1 영화빌딩 606호
사업자 등록번호 : 104-42-08997 대표:박선식(kmh@kmhealt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