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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목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차이 극복(2)

2004/01/10

내    용

제목 없음

불교와 그리스도교의 비교(2)

본각과 시각-아버지와 아들

진리 당체와 이의 구현은 별개의 것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괴리현상은 인간 실존의 문제이며 인간의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실천적 투신이 요구된다.

1. 본각(本覺)-시각(始覺)

인간의 고뇌와 이를 극복하기 위한 투신을 [대승기신론]의 표현에서보면, 중생이 사물의 참 모습을 보지 못한 채, 이른바 '불각'(不覺)의 상태에 빠져있기 때문이라 한다.
근원적 어둠인 '무명'으로 인해 주·객의 분리가 일어나고, 인식의 주체가 성립되면서, 그 대상도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대상에 집착함으로써 업(業)에 끄달리게 된다.
이것이 깨닫지 못함이 '불각'(不覺)의 상태라고 [대승기신론]에서는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불각의 상태에 빠져있는 중생이 망념을 떨치고 각(覺)의 상태로 나아갈 수 있도록 , 즉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
원효의 주석에 의하면, "깨닫는다는 것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나는 것" 이다.([대승기신론소]).
[대승기신론]에서는 망념을 떠나는 것, 즉 깨치지 못한 상태(不覺)에서 깨침의 상태(覺)로 나아가는 것을 일컬어 '시각'(始覺)이라 부르며 중시한다.

'시각'은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시각은 전혀 없던 것을 새삼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비로소 깨닫는다는 것은 여래께서 이미 이루어놓으신 평등한 법신(法身), 즉 진리 자체로 인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중생심이 본래 진여(眞如)와 같기 때문에 그 진여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바꾸어 말해, 중생심의 진여와 같은 측면이 없고서는 비로소 눈뜨는 경험이란 있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달리 말하면, 비로소 눈뜨는 경험(始覺)이란 중생심의 본래적인 측면으로서의 진여가 스스로를 일으킨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처럼 중생심에는 그 자체로 이미 완성되어 있는 본래적인 측면이 있다.
[대승기신론]에서는 이를 본래적인 깨달음, 즉 '본각'(本覺)이라 말한다.

중생은 본래 깨달아 있다는 것이다.
본래 깨달아 있다는 점에서는 새삼스럽게 비로소 깨달을 것이란 없다. 인간은 그 자체로 진여의 성품을 완전히 갖추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진리란 그 자체로 완성되어 있고 본래 주어져 있는 것이지, 전에 없던 것을 인간이 새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통찰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각'(始覺)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앞으로 일어나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말도 맞다.여기에서 여전히 떨쳐버려야 할 그 무엇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원효는 깨달음이란 마음의 본체가 망념을 '떠나는' 것이라 주석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교적으로 표현하면 인간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진리이지 인간이 아니라는 말과 같다(요한 8,32).
본래적인 깨달음으로 인해 경험적인 깨달음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아무튼 중생의 마음이 대승과 같다는 바로 그 사실이야말로 본래적인 깨달음의 내용이다.
이 깨달음의 내용이 스스로를 일으켜 인간의 경험 안에 들어오는 것이 바로 시각(始覺)이다.
깨달음의 내용이 스스로를 일으키는 것이기에 새삼스럽게 깨달았다고 할 것도 없다.
결국 시각이란 깨달을 것이 따로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것인 셈이다.


2. 아버지-아들

이러한 본각과 시각의 관계는 [요한복음]에서 전반적으로 말하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비교된다.
"일찍이 아무도 하느님을 보지 못했다. 아버지의 품 안에 계신 외아들 하느님이신 그분이 알려주셨다."(1,18)
즉, 본각이 시각에 의해서만 알려지는 원천적 사실이듯이, 아버지는 그 외아들에 의해 결정적으로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렇게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전에는 비록 완성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동시에 그것은 가려져 있는 세상이기도 하다.
'시각'에 의해 '본각'이 드러나게 되는 것처럼, 아들에 의해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확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들은 아버지의 육화(incarnation)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서 거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1,14a)
계속해서 [요한복음]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합니다."(3,34)
외아들 예수는 하느님이 보낸 자이며, 따라서 그에게서 나오는 말은 하느님의 말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내 아버지께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고 있습니다."(5,17),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들을 아들도 똑같이 합니다."(5,19b)
"나는 진리를 증언하기 위해, 바로 그 일을 위해 났으며, 또한 그 일을 위해 세상에 왔습니다."(18,37)
여기서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들"이나 "진리"는 '본각'의 차원과 비교된다.
아버지께서는 본래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며, 그러한 사실을 알고 보여준 이는 아들 예수이다. 따라서 '아들의 일'은 '아버지의 일'의 구체화인 셈이다. 아들은 본각의 구체화, 즉 '시각자'인 것이다.


3. 시각-본각 / 아들과 아버지

시각 이후에 본각을 알게 되듯이, 아들을 보면 아버지가 보인다-- "나를 본 사람은 이미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더하여 시각하게 되는 순간 그것이 본각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듯, [요한복음]에서는 결국 "아들과 아버지는 하나"(10,30)라고 말한다.
그래서 "아들 것은 모두 아버지의 것이고 아버지의 것은 모두 아들 것이다."(17,10) 그리고 아들의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온 영광이다."(1,14b)
중관불교의 표현을 따르면, 아버지가 "진공"(眞空)이라면, 아들은 "묘유"(妙有)인 셈이고, 정토진종의 표현을 따르면, 아버지가 형상을 초월해 있는 법성법신(法性法身)이라면, 아들은 형상을 지닌 방편법신(方便法身), 즉 아미타불인 셈이다.
* 아미타불은 무상(無相)의 세계를 버리고 중생이 살고 있는 상(相)의 세계로 오신 진여임

스즈키(鈴木大拙)는 이 아미타불을 그리스도와 관련짓는다- "정토진종에서 아미타는 어떤 면에서 하느님과 그리스도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아미타는 빛(abha)이요 생명(ayus)이요 사랑이며, 그의 사랑과 생명으로부터 그의 원들을 발하며, 이 원들을 통해 아미타는 우리와 연결되는 것이다.
원은 중보자이며 아미타의 사랑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그가 수행하는 증보의 역할은 그리스도와 같은 효력을 지닌다."(길희성, {일본의 정토사상}, 참조 pp.251-52)
본원은 아미타불의 구원 의지와 힘이다.
"다시 말하면 본원은 인간적 술어로 표현된 아미타 자신이다." 그리스도가 말씀(로고스)이며, 그 말씀으로 인해 일체 존재자들이 생겨난 것처럼, 아미타의 본원은 중생과 아미타를 잇는 중보자로서의 아미타 자신이다.
그리고 말씀의 구체적 육화가 역사의 예수이듯이, 이러한 아미타의 놀라운 구원 의지를 전해준 분은, 정토진종의 개조신란(親鸞)에 의하면, 석가모니이다.
석가모니를 보면 실상 아미타를 보는 것이고, 아미타를 보면 실상 법성법신, 즉 진여 자체를 보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역사의 예수를 보면 초월적 그리스도를 보는 것이고, 그리스도를 보면 아버지를 보는 것이다.
단적으로 "나를 알았더라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는 예수의 말은 상(相)의 세계와 법신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각'에 빠져있는 이들은 마치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는 그저 나자렛이라는 시골 촌뜨기일 뿐이며, 유대교의 율법을 무시하고 종교적 권위에 도전하는 위험인물일 뿐이다.
이들은 예수의 본래적 차원, 즉 '하늘'의 차원을 전혀 보지 못한 채, '땅'의 질서에 따라서만 판단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땅에서 난 이는 땅에 속하고 땅의 일을 말합니다."(3,31a): "당신들은 당신들의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으니 그 아비 욕망대로 행하려고 합니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카인의 후예)였으며, 진리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8,44)
"땅에서 난 이"는 물론, "악마", "살인자"와 같은 험악한 표현들은 모두, [대승기신론]의 표현대로 하면, '불각'의 현실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 용어들이다.
깨닫지 못한 이가 깨달음의 세계를 무시하고, 그 깨달은 이를 죽이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하늘에서 오시는 분은 모든 이 위에 계시며, 자기가 보고 들은 것을 증언한다"(3,31b)고 말한다.
이 때 "하늘"이 '본각'에 해당한다면, "거기서 오셔서" "보고 들은 것"을 말하는 이는 '시각'의 차원에 해당한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는 하느님의 말씀을 이야기한다."(3,34)   아들의 말은 아버지로부터, 예수의 말은 하늘로부터 왔다.
역으로 하늘에서 왔기에, 겉보기에는 땅의 말을 하는 듯 하고, 땅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듯 하지만, 그 속에 '하늘'의 말이 담겨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세례자 요한의 입을 빌어 "사람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다"(3,27)고 말한다.
예수의 일은 모두 하늘로부터 온 것이라는 말이다. 이런 식으로 '본각-시각'의 구조는 '하느님-예수'/'아버지-아들'의 구조와 상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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