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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슬픔이 주는 치유적
기능
죽음은 누구에게나 슬픈 것이고 피할 수 없는 현실이다.
그러나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살아간다면 자연과 친근하게 접촉하고 공감하여 평화를 누리고, 자신의 죽음까지도 자연의 순환 안에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어떤
노인들은 자신의 미래가 점점 빨리 줄어들고 있다는 사실을 느끼면서도 평안을 느끼며 정원을
손질하며 손수 논밭을 경작하고 싱싱한 열매를 따며 기쁨 속에
살아간다. 죽음 또한 순환의 한 과정으로 볼 때 죽음 다음 단계는 또 다른 시작이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자신을 이 세계와 연결된
존재로 보느냐, 단절된 자아(自我)로 보느냐에 따라 죽음에 대한 태도는 결정된다. 올바른 사생관(死生觀)을 확립한 노인들은 여생을
보람되게 살아가며, 젊은이들은 성숙된 삶의 자세를 견지하며 힘차게 살아간다. 죽음이나 병고는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실존적 상황이며
불안 요소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기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경험들, 예컨대 심각한 질병, 사랑하는 이나 친척의 죽음, 삶
속에서 경험하는 좌절과 실패, 여러 가지 상실(喪失) 등을 경험하면서 죽어야 할 운명임을 스스로 알게 된다. 대부분의 종교
전통이나 생명 철학에서, 이러한 소멸에 대한 불안은 [창조]를 일깨우는 기회로 바뀔 수 있음을 공통적으로 암시하고 있다.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그의 시 [태양의 찬가](canticle to the sun)에서 모든 자연을
형제 자매로 느끼며 자연 속에 빛나는 하느님의 빛을 찬양한다. 그는 죽음을 자매라고 부르고 그 속에서 하느님의 빛이 빛나고
있다고 노래하였다. 또한 선구적 자연주의자인 존 뮤어(John Muir)는 어린이들에게 죽음에 대한 자연학습이 올바른 성숙을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숲들과 목장들, 들판과 산들, 별무리의 흐름들이 가르쳐
주는 대로 생명과 죽음을 보게 하면, 그들은 죽음에 돋아 있는 가시가 사라지고 죽음(死)도 생명(生)과 같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
라고 하였다
우리가 절망적인 병고나 죽음이라는 상황 속에 처했을 때 자연의 리듬과 공조되어 순화되면 그
고통스러운 상실감을 조절할 수 있다. 즉 (1) 죽음은 슬픈 것이지만, 죽음은 더 이상 파괴적인 것이 아니다. 이승에서의 삶을 접고 새로운 장에 이르기 때문에 오히려 시작을 축복해줄 수 있는 마음을 일으킨다. 자신의 일상가운데 이타적인 부분들을 실천해보면 고통으로부터 훨씬 쉽게 빠져나오게 된다. (2) 자연순환에 대한 깨달음은 죽음이 새로운 시작과 연관되기 때문에 죽음을 오히려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인조공간을 탈피하고 자연 속에 거닐며 자연의 리등과 동조해 본다. 나무들.. 바위.. 산.. 들풀들.. (3) 같은 맥락에서 질병은 괴롭고 슬픈 것이지만 질병이 질병현상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의미를 깨닫고 온전히 투신할 때 인간은 보다
온전해지고, 질병을 초월하여 자유롭게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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